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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6-10-07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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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도 어디선가 말하였지만,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면서 여러 자료를 들추다 보면, 때로 법학논문 쓰는 것과는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개인적으로 흥미를 끄는 것에도 접하게 되는 일이 있다. 여기서 소개하는 자료도 나로서는 거기에 해당하였다. 나는 정치학자로 알고 있던 에른스트 프랭켈(Ernst Fraenkel)이 1945년 8월의 광복 이후에 38도 이남을 '다스린' 그 미군정청에서 법률고문(Legal Adviser)으로 있었음을 최근에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 계기가 된 것은, 1999년에 노모스(Nomos) 출판사에서 출간된 그의 『전집(Gesammelte Schriften)』 제3권이 『독일과 한국에서 민주주의의 재건(Neuaufbau der Demokratie in Deutschland und Korea)』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는 사실(이하 '이 책'이라고 부르기로 하며, GS III로 인용한다)이 어떤 자료를 읽던 내 눈에 번쩍 띄었던 것이다. 프랭켈이 다름아닌 우리나라에 대해서, 그것도 우리나라의 민주주의의 '재건'에 대한 글들을 여럿 썼다고? 나는 바로 서울대 도서관에 이 책이 있는지 찾아보았고(다행히 모두 6권으로 된 전집에서 제1권부터 제4권까지를 소장하고 있었다), 또 독일에 이 책을 주문하였다. (위) 1947년 서울에서 촬영된 미소공동위원회 제2분과위원회 구성원들과 프랭켈(오른쪽 세번째)의 단체 사진. (아래) 프랭켈이 아내 한나, 미국인 ?지인과 함께 한국에서 찍은 사진(이상 GS III, S.644). 1898년에 태어나 1975년에 사망한 프랭켈은 제2차 대전 후에 베를린자유대학에서 교수를 지냈고 독일에서 현대 정치학의 '아버지'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정치학자가 어떻게 하여 그렇게 일찍이 저 멀리 지구 반대편에 있는 한국의 민주주의를 논하게 되었을까? 황금성pc버전 그는 제1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에 노동운동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한 '전투적 사회주의 변호사'로 활동하였고, 저술은 오히려 활발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인종적으로 유태계이어서 결국 1938년에는 영국에 잠시 머물다가 미국으로 '망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미국에서 나치 정권의 경험을 음미·평가하고(그 종합적인 결과는 1974년에 독일에서 『복합국가(Doppelstaat)』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또 미국의 정치를 면밀히 관찰하면서, 훨씬 더 자유주의적인 관。으로 옮아갔다고 한다. 그는 1941년 6월에 시카고대학에서 법학박사(Dr. of Law)의 학위를 받고 1944년 8월에 미국 국적을 취득하였는데, 그에 전후해서 그는 미국의 여러 기관, 특히 유태인 구조기관에서 일하였다. 독일의 패전 후 그의 많은 '동료'들이 독일로 돌아가 。령 당국의 업무를 돕은 역할을 하였음에도, "그가 실제로 겪은 수많은 박해의 기억, 그리고 상상을 훨씬 초월하는 그 대학살"이 그로 하여금 선뜻 독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미국에 남았다. 그리고 미국 정부의 청을 받아들여 미군정청의 법률자문 직을 수락하고 1946년 1월에 서울로 왔던 것이다(그에게 한국에서의 변호사 자격을 부여하는 별첨 '군정청 법무국장'의 인증서 사진도 이 책 647면에 붙어 있다). 그러나 그는 1950년 6월의 전쟁으로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1951년 4월에 독일로 돌아가 서베를린에 새로 만들어진 「베를린자유대학교(Freie Universitat Berlin)」에서 정치학 교수에 취임하였다. 내가 그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것도 1982년 가을에 「독일학술교류처」의 장학금을 받아서 위 대학교로 유학을 가서이었다(당시의 대법원장은 법관은 외국 돈을 받는 것이 아닌 이상 외국에 가서 공부할 수 없다는 방침을 세워 실행하였다). 오리지날야마토 1946년 3월 11일자 대법원장 김용무 명의의 프랭켈에 대한 '한국에서의' 변호사자격 인증서(GS III, S.647). 이 책에 실린 한국에 대한 프랭클의 글은 모두 100면이 넘고, 이 책의 편집을 맡은 게르하르트 괼러(Gerhard Gohler)와 디르크 뤼디거 슈만(Dirk Rudiger Schumann)의 '서문'도 프랭클의 한국에서의 직책 또는 역할을 자세하고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리하여 이 글들은 우리가 1945년 8월 광복을 맞이하면서 맞이한 미군정 아래에서 한 마디로 "일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데 실제로 어떠한 법문제(하나의 예: 계약 불이행을 이유로 ?채무자의 신병을 구속할 수 있는가?)가 제기되었던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흥미롭고 생각하게 하는 바가 많은 좋은 자료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 책에서 내가 읽고서 무릎을 친 에피소드 한 가지만을 소개하기로 한다. 1946년 1월 17일에 서울에 도착한 프랑켈은 그달 28일에 "처음으로 한국인과 재미있는 대화를 나누었다." 그날 그는 무슨 일로 위하여 국립도서관에 갔는데, 그를 도와주려고 군정청 사람이 따라왔다. "그 사람과 의사소통을 하려고 아무리 애써서 헛수고였다. 그 노력을 포기하려는 차에 그가 유창한 독일어로 독일어를 할 줄 아느냐고 물어와서 [비로소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는 자기가 대학의 조교수였고, 지방법원 판사였다고 했다. 자신의 전공은 상법인데, 독일 상법에 관한 문헌을 읽기 위하여 독일어를 공부했다고 했다. 그는 빌란드의 상법과 슈타우프의 [독일상법전] 주해서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우리는 국립도서관에서 중앙청으로 걸어서 돌아오는 동안 상당히 복잡한 법문제들에 대하여 진지한 토론(serious discussion on rather complicated legal problems)을 하였다 모바일 릴게임사이트 ."(GS III, S.386, 1월 28일자 일기) 나는 이 한국인이 홍진기가 아닌가 추측한다. 홍진기는 당시 군정청 법제조사국의 조사위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거기서 일하던 한국인 법률가 중에 상법 전공으로 대학에서 '조교수'로 있었고(아마도 이는 '조수'를 의미하는 것이리라. 홍진기는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한 후 조선인으로는 극히 드물게 '조수'로 있었으며 그 '조수논문'이 그 유명한 회사합병교부금에 관한 것이다), 그 후 지방법원 판사를 지낸 것(홍진기는 교수가 되고 싶었으나 일본인들은 조선인에게는 법을 포함하여 문과계 교수 자리를 전혀 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1942년에 전주지방법원 판사가 되었다. 1945년 7월에 얻는 그의 맏딸 이름이 '나희(羅喜)'인 것은 전라도에서 얻은 기쁨이라는 뜻을 담아서이다)은 홍진기 외에는 없지 않은가 싶다. 한편 빌란드의 『상법』(Wieland, Handelsrecht)이나 슈타우프의 『상법전 주해서』(Staub, Kommentar zum Handelsgesetzbuch)는 모두 당시 독일의 가장 '잘 나가는' 상법 문헌으로서, 후자는 오늘날까지도 후속판이 이어지고 있고(민법전 주해서의 경우로 슈타우딩어 주해서[Staudinger Kommentar]에 대응하는 것이다), 전자는 근자에 잘 알려진 법학 관련 출판사에서 번각판(Duncker & Humblot Reprints)이 나왔다(예를 들면 Handelsrecht: Die Kapitalgesellschaften. Systematisches Handbuch der Deutschen Rechtswissenschaft. Dritte Abteilung, 2016). 홍진기는 1917년 생으로 당시에는 아직 서른이 안 되었다. 그 젊은이가 48세의 프랭켈과 "상당히 복잡한 법문제에 대해서" 독일어로 "진지한 토론을 하였던 것"이다. 양창수 전 대법관 eilung,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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